남연군묘
조선조 말 종실중흥에 사로잡혀 있던 흥선군 이하응(李夏鷹)은 경기도 연천
땅 남송정에 있는 부친 이구(李球)의 묘소가 풍수지리상 좋이 않은 자리로
생각하고 있었다. 이 때 지사(地師) 정만인에게 간청해 얻게 된 곳이 바로 이
곳이다. 헌종 10년, 부친 남연군(南延君)이 작고한 지 9년째 되는 해로 흥선군
나이 25세였다. 당시 흥선군이 이곳에 당도해보니 1400년 고찰 가야사(伽倻寺)
가 있었다.
정만인이 지정한 명당은 2대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로 가야사 마당에
있었던 5층석탑인 금탑(金塔) 자리를 점찍었다. 흥선군은 이 자리에 묘를 쓰자니
금탑을 지키듯이 자리한 가야사 보웅전(普雄殿)이 눈에 거슬렸다. 그래서
당시 이 일대 땅주인이자 고을 최고 부자인 윤석문(尹石門) 집안 종손에게
간청해 일단 금탑에서 북서쪽 약 400m 떨어진 구광(舊壙)터라는 곳에다 부친
묘소를 옮겨 쓰도록 허락을 받아낸다. 당시 흥선군은 정2품의 종친 귀공자에다
궁중살림을 총관장하는 도제조(都提調)였으니 윤씨 집안에서 청을 거부 할 수도
없었다.
구광터로 아버지 묘소를 옮겨오는 1차 목표를 달성한 흥선군은 이듬해 충청도
관찰사에게 압력을 넣어 덕산현감에게 명령케 하여 가야사에 승려가 살지 못하게
하고 폐사로 만들어버린다. 그 다음해 흥선군은 보웅전에 불을 지르고,또 한 해가
지난 봄에 금탑마져 허물고는 구광터의 부친묘를 금탑자리로 옮긴다.
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(命福)을 낳았는데, 철종의 후사가 없어 가까운
종손인 명복이 12세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(高宗)이다.
188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했는데. 관에는 손을 못댄 채
돌아갔다.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원군은 쇄국과 천주교를 탄압하는 계기가 됐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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